"분지(糞地)"    

                                           남정현 

 
  어머니.
  제발 몸을 좀 그렇게 떨지 마십시오. 미관상 과히 좋아 보이질 않습니다. 뭐
제가 지금 죽을 것 같아서 그러신다구요. 참 걱정도 팔자시군요. 적어도
홍길동(洪吉童)의 제10대손이며 동시에 단군의 후손인 나 만수(萬壽)란 녀석이
아무렴 요만한 정도의 일을 가지고 그렇게 쉽사리 숨을 못 쉬게 될 것 같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누가 보면 웃습니다. 저는 설령 이보다 더한 결정적인 궁지에
몰리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처럼 그렇게 용이하게 미치거나 죽어 없어질 시시한
종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렇다고 저는 물론, 제 목숨이 처한 지금의 이 절망스러운 판국을 조금이라도
부인하거나 변호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좀 속되게 말하자면 풍전등화 격이라고나
할까요. 저를 포위하고 있는 객관적인 정세로 미루어보아서 말입니다. 제아무리
미련한 놈의 소견으로 보아도 제 목숨이 지금 이 마당에서 신(神)의 부축이 없이
인간만의 힘으로 어떻게 살아나리라고는 감히 생각할 수가 없겠지요. 천하가
소상하게 알다시피 저는 지금 독안에 든 쥐니깐요. 어디 원 눈곱만한 면적이나마
빠져나갈 구멍이 있어 보입니까. 자, 보십시오. 저를 상대로 한 저 삼엄한 무장과
경비(警備)를, 저의 이 주먹만한 심장 하나를 꿰뚫기 위하여 정성껏 마련해놓은
저들의 저 엄청난 군비의 숫자를 말입니다. 지금 제가 숨어 있는 이
향미산(向美山)의 둘레에는 무려 일만여를 헤아리는 각종 포문과 미사일, 그리고
전미군(全美軍) 중에서도 가장 민첩하고 정확한 기동력을 자랑하는 미 제 엑스
사단의 그 늠름한 장병들이 신이라도 나포할 기세로 저를 향하여 영롱하게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것입니다.

  방금 입수한 '펜타곤' 당국의 공식발표에 의하면 이 땅 위에서 만수란 이름의
육체와 그의 혼백까지를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서 뿌려진 금액이 물경 이삼억 불에
달한다고 하니 이거 정말 죽은 사람들이 기겁을 할 노릇이지요. 이삼억 불이면 뭐
집 한 채 값이나 되느냐구요. 당신도 참 왜 그렇게 한심스러운 말씀을 하십니까.

  물론 죽는 날까지 불과 몇 식구가 머물 집 한 채를 장만하지 못하여 잠결에도
노상 집, 집 하면서 고함을 치시던 당신의 계산으론 사실 집 한 채 값이란 하늘의
별만치나 헤아리지 못할 막대한 숫자가 되어 주겠지요. 하지만 어머니. 당신에겐
좀 과격한 말씀이긴 합니다만 솔직하게 말해서 이삼억 불이면 집 한 채 값이 훨씬
넘습니다. 뿐더러 그것은 대한민국의 일년 예산에 해당하는 금액이라면 당신은
어떡하시겠습니까. 뭐 현기증이 나신다구요. 그러시겠지요. 금빛으로 황홀하게
단장한 트레이드마크, 유 에스 에이, 향미산 기슭을 첩첩하게 메운 딸라의 부피
유, 에스, 에이. 그 거대한 미국의 눈부신 표정(表情) 앞에서 제정신을 수습하기란
사실 그 누구에게 있어서나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니깐요. 좀 현기증이 나신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그렇게 우려할 만한 병적인 증상이라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아니, 설혹, 그것이 병적인 증상이라고 하더라도 당신은 이미 저승에 가신 몸.
사람이 나서 두번 죽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안심하십시오. 그리하여 제가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미 저승으로 행차하신 당신의 건강에 관해서가
아니라 아직도 이 땅위에 남아서 전전긍긍하는 제 동료들의 이 구차스러운 목숨에
관해서인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왜 당신의 눈에는 잘 보이질 않습니까. 뭐라구요. 눈이 썩어서
아주 엉망이 되셨다구요. 하, 참 딱도 하십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저승에
가셔서까지 융통성이 없으신가요. 이용하십시오. 썩어 없어지는 육체의 눈이
아니라 영원히 남아서 초롱초롱 빛나는 당신의 그 아리따운 영혼의 눈동자를
말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어서 이용하여 보십시오. 육체의 눈에 의존하는 것보다
더욱 선명하게 잘 보여올 것입니다. 자, 그럼 한번 휘둘러보십시오. 지금 이
향미산을 중심으로하여 직경 수천 마일 이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민들의 이
어이없는 상태를 말입니다. 그들은 지금 오랫동안 정을 나눈 일체의 친지며
가산(家産)과 석별의 눈물을 흘리고 지층 깊은 곳에 몸을 처박고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두더지도 아닌 인간의 체면에 저게 무슨 꼴이란
말씀입니까. 하지만 그들은 백의민족 특유의 인내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신의
어깨에라도 매달리는 심정으로 펜타곤 당국이 수시로 발송하는 지시서에
순종하여야만 겨우 목숨을 건질 수가 있다니 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왜 당신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습니까. 다이얼을 워싱턴발 0.038메가사이클에 맞추시고 조용히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어디까지나 성조기(星條旗)의 편에 서서 미국의 번영과
그리고 인류의 자유를 확장시키는 작업에 뜻을 같이한 자유세계의 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미 누차 반복하여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러분들의 귀중한 생명과
재산과 그리고 자유와 안전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고 있는 본 펜타곤 당국은 최근에
극동의 일각인 코리아의 한 조그마한 산등성이 밑에서 벌어진 그 우려할 만한
사태에 접하고 놀라움과 동시에 격한 분노의 감정을 금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세계의 자유민 여러분! 이제 안심하십시오. 여러분을 대신하여 본 당국은
바야흐로 역사적인 사명감에 불타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 이름부터가 사람 같지
않은 홍만수란 자가 저지른 그 치욕적인 사건은 분명히 미국을 위시한 자유민
전체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범죄적인 중대한 도전행위로 보고 본 당국은 즉각
사태수습에 발벗고 나선 것입니다. 축복하여주십시오. 이제 머지않아 홍만수란
인간은, 아니 인간이 다 무엇입니까, 그는 분명히 오물(汚物)입니다. 신(神)이
잘못 점지하여 이 세상에 흘린 오물. 그가 만약에 악마가 토해낸 오물이 아닌
담에야 감히 어떻게 성조기의 산하에서 자유를 수호하는 미국의 병사를, 그의
아내의 순결을 짓밟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전세계의 자유민은 지금 분노의 불길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 병사의 한 가정을 파괴하려는 그따위 작업에
종사하는 인종은 전인류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악(惡)의 씨라는 사실에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제 마음의 안정을 얻으시고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자유세계의 열렬한 성원을 토대로 하여 일억 칠천여만 미국인의 납세로써 운영이
되는 본 펜타곤 당국은 이제 머지않아 홍만수란 이름의 그 징그러운 오물을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쓸어버릴 것입니다. 자유민의 안전과 번영을 옹호하는 이
역사적인 과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본 당국은 수억 불이라는 이 어머어마한 지출을
무릅쓰고, 일벌백계주의에 입각하여 홍만수는 물론, 그의 목숨을 며칠이나마
돌보아 준 향미산 전체의 부피를 완전히 폭발시킬 계획인 것입니다. 자, 여러분,
앞으로 남은 시간 이십분. 향미산 기슭의 주민들은 더욱 땅 속 깊이 몸을
묻으십시오. 그리고 고개를 숙이십시오. 명령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 앞으로 남은 시간 이십분. 이제 불과 이십분 후면 말 그대로
지축(地軸)이 흔들릴 것입니다. 우주가 동요하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현란한
섬광(閃光)은 하늘을 덮을 것입니다. 풍비박산하는 향미산의 종말. 그러면 끝나는
것이겠지요. 소위 그들의 성스러운 사명(使命)이 말입니다. 조상(祖上)의 해골과
문화재와 그리고 이 향미산을 발판으로 하여 목숨을 유지하던 일체의 생물은 그
흔적도 없이 조용히 사라져주겠지요. 폐허와 침묵과, 어머니, 왜 진저리를
치십니까. 당신이 진저리를 치시는 동안, 펜타곤 당국에서는 그들의 성공을
자축하는 찬란한 축제(祝祭)가 벌어질 것입니다. 여인과 술과 그리고 터지는 불꽃
속에 춤은, 리듬은 전미주(全美洲)를 감미롭게 덮으면서 저의 죽음을 찬미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 저는 왜 그런지 조금도 떨리지 않는군요. 그렇다고 제가
지금 미국의 그 크나큰 힘과 약속을 신용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도 몇
갑씩이나 미국제 껌을 질겅질겅 씹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저의 형편에 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믿습니다.
  수목(樹木)과 바위와 야수(野獸)와 그리고 인디안만의 복지(福地)였던 구백여만
평방킬로미터의 그 광막한 토지를 개간하여 인간의 천국을 이루었다는 아메리칸의
그 초인적인 투지와 열의와 지모(智謀)를 철저하게 믿는단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저까지 뭐 떨어야 하나요. 물론 전세계에 천명한 그들의 약속대로 불과 이십분
후면 저의 육체는 먼지가 되어 바람 속에 흩날릴 테지요. 하지만 저는 과히 겁나지
않는다구요. 그렇다고 제가 뭐 죽나요.

  어머니.
  정말 제가 지금 요만한 정도의 정세에 눌리어 온몸이 편편이 부서질 것
같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너 이놈, 뭣을 믿고 그렇게 뻥뻥거리느냐구요.
당신도 참 점잖지 못하게 뻥뻥이 다 무엇인가요. 뻥뻥이란 차륜의 경적을 본딴
아이들의 낱말인 것입니다. 저승에 가시더니 섭섭하게도 말까지 그렇게
퇴화하시는군요. 자식 된 도리로서 듣기에 참으로 민망스럽습니다. 저는 정말
아이들의 말처럼 아무런 보증이 없이 멋대로 뻥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와 증거를 바탕으로 하여 자신 있게 여쭙는 것입니다.

  어머니.
  오해하지 마시고 한번 냉정한 입장에서 저의 형편을 좀 헤아려보십시오. 당신
생각엔 이 세상에 사나이로 태어난 만수란 녀석이 정말 이대로 한번 피어보질
못하고 속절없이 죽어야만 할 것 같습니까.
  정말 오물처럼 한번도 제 것을 가지고 세계를 향하여 서본 적이 없이 이방인들이
흘린 오줌과 똥물만을 주식(主食)으로 하여 어떻게 우화(寓話)처럼 우습게만
살아온 것 같은 저의 이 칙칙하고 누추한 과거를 돌아볼 때에 말입니다. 제가
이대로 아무런 말이 없이 눈을 감는다고 한번 생각하여보십시오. 결과가 얼마나
무섭겠는가를, 그러면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저를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인륜(人倫)이며 천륜(天倫)을 다 떠들어보아도 한 인간이 그렇게 시시하게 죽는
법은 없다고 하나님은 저를 향하여 격노할 것입니다. 뿐더러 저의 10대조인 홍길동
각하를 차후에 제가 무슨 면목으로 알현(謁見)하겠습니까. 그리하여 저는 지금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으며 떳떳하게 한번 살아보지 않고는 도저히 죽을 수가
없는 딱한 형편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탓으로 핵무기(核武器)의 세례가 아닌 '노아'의 홍수(洪水)가 다시 한번 지상을
휩쓸더라도 그 노아의 방주(方舟)엔 제가 제일 먼저 타야 할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머니.
  이제 곧 저의 육체가 이 향미산과 더불어 폭발하더라도 흩어진 저의
육편(肉片)은 조용히 제자리에 돌아와줄 것이라고 저는 믿는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어머니, 거짓말이 아닙니다.

  활빈당(活貧黨)의 수령으로서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둔갑술이며 신출귀몰하는
도술(道術)로써 썩고 병든 조정(朝廷)의 무리들을 혼비백산케 하신 제 선조인
홍길동의 비방(秘方)을 최대한으로 활용함으로써 사후(死後)의 당신이나마 저도
한번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생각으로 저의 가슴은 지금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기대하여주십시오, 어머니.

  그래 그런지 저는 조금도 당황하질 않습니다.
  삶과 죽음과의 간격이 앞으로 불과 이십분으로 단축되었다고 지금 귀가 아프게
떠듭니다만, 그러나 저의 마음은 추호도 동요됨이 없이 도리어 이렇게 이제야 겨우
제 세상을 만난 기분인걸요. 참으로 다행한 노릇입니다. 차분하게 가라앉는 마음.
당신도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이렇게 태연한 마음으로 향미산의 정상에 올라와
참으로 오래간만에 허리며 다리를 쭉 펴고 이 청신한 자연의 정기(精氣)에 잔잔히
취하여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제 수족의 주변에서 부드럽게 흔들리며 미소하는 풀이며 가랑잎의 저
우아한 고전무용을 한번 감상(鑑賞)하여보십시오. 당신은 공연히 멋도 모르고
너무나 일찍 이 세상을 하직하신 당신의 그 어이없는 행동에 대하여 끓어오르는
회한과 고소(苦笑)의 형벌을 감내하지 못할 겁니다.

  뿐더러 암놈을 찾아 눈알이 발갛게 상기되어 가지고는 이끼 낀 바위와 돌 사이를
누비며 회전하는 다람쥐의 저 참신한 연기(演技)는 어떻습니까. 그리고 끝내
인력의 법칙에 순종하여 알알이 굴러 떨어지는 상수리며 도토리. 그런데 아
어머니, 지금 잔잔히 흔들리는 소나무 가지 사이사이로 환하게 내다보이는 파란
저것은 무엇인가요. 아 참 하늘, 하늘이군요. 청아한 코발트, 그리고 아 투명한
성수의 빛깔. 하늘, 아 참 어머니 저게 바로 하늘이군요. 너 이놈, 나이 삼십이 다
된 놈이 기껏 하늘을 보고 흥분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으냐구요. 물론 부끄럽습니다.
어머니, 그러나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이렇게 하늘을 처음 보는 기분일걸요.
황홀합니다. 왜 그런지 저는 정말 생전 처음 하늘을 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종의 경탄과 부푼 감정으로 하여 온몸이 다 나른하게 펴지는 것입니다. 머리
위에 항시 저렇게 싱싱한 하늘이 저를 향하여 줄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아온 과거. 그러니까 저는 삼십여년이란 긴 세월을 그저 열심히 땅만을
쳐다보며 살아온 셈이지요. 누가 뭣 좀 흘린 것은 없을까. 모함과 착취와 그리고
살의(殺意)에 찬 독한 시선을 피하며 오로지 연명을 위한 먹이를 찾느라고
저에게는 잠시도 머리 위를 바라볼 마음의 여유가 전연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이 비천한 자식을 이해하여주시고 제 말씀을 좀 들어주십시오.
  이제 머지않아 핵무기의 집중공격으로 불꽃처럼 팡 하고 터져야 할 몸. 그렇다고
제가 죽을 리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어머니, 이 역사적인 위기의 순간에 서서 제가
아무렴 하늘 따위를 상대로 하여 이러니 저러니 정감을 자아낼 리야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제가 지금 진실로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당신
자신에 관해서인 것입니다. 정말 이렇게 오래간만에 타인과의 관련이 없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아(自我)의 품속에 들어와 이끼 낀 바위와 돌과 그리고
풀이며 다람쥐의 친근한 벗이 되어 하늘이 주는 청신한 정감에 흠뻑 젖어
있으려니까, 불현듯 당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는 이 희귀한 사실에 관해서인
것입니다.

  좀 허풍을 떨자면 이십 년만의 기적이라고나 할까요. 그렇습니다. 어머니,
용서하십시오. 어느 이방인의 배부른 소견으로 보면 돌아가신 어머님이 생각났다는
이 남의 자식 된 도리로서 백번 지당한 사실을 가지고 기적이니 뭣이니 하며
대서특필하는 저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겠지요. 미친놈이 아니면 후레자식의
소행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는
당신을 잊어야만 했으니까요. 그 길만이 제가 사는 길이었다면 당신은
노하시겠습니까. 그리하여 저는 제 의식(意識)의 깊은 밑바닥에서조차 당신에 관한
일체의 기억을 쓸어버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천벌을 받을 놈이지요.

  하지만 어머니,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굶어 죽지 않고 맞아 죽지 않고 용케
목숨을 이어가자면 말입니다. 너 이놈, 덮어놓고 이런 세상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세상이냐구요. 참 당신도 딱도 하시군요. 뭘 그렇게 소소한 문제에까지
일일이 질문을 하십니까. 의문은 발명의 바탕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다 칠판 밑에서
학생들이나 할 소리지, 다 큰 어른이 그런 소릴 하면 병신 대접을 받습니다. 이런
세상이란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세상이란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마저 없는 세상이 바로 이런 세상이지 뭡니까. 뭐라구요. 그런 정도의 설명을
가지곤 잘 모르시겠다구요.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습니다. 역시 이런 세상에서
직접 살아보지 않고는 끝끝내 모르실 테니깐요. 그런 면으로 봐선 저도 역시
행복한 연대를 사는 일종의 특혜족(特惠族)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 모든
것을 대충은 다 알고 있으니깐요. 민중을 위해서 투쟁한 별다른 경험이나 경륜이
없어도 어떻게 '반공'과 '친미'만을 열심히 부르짖다 보면 쉽사리 애국자며
위정자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세상이란 것도 알고요, 오로지 정치자금을 제공한
몇몇 분들의 이익과 번영만을 위해서 입법(立法)이며 행정(行政)이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좌우간 어머니.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저와 같은 비천한 백성이 천명(天命)을 다하기 위하여
땀을 빨빨 흘리노라면 말입니다. 하늘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듯이 또한 뒤를 돌아다
볼 마음의 여유가 전연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히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어버리는 셈이지요. 이렇듯이 과거를 잊은
자의 수중에 무슨 미래란 이름의 황홀한 상태가 준비되어 있을 턱이
있었겠습니까.

  어머니.
  저승에 계신 어느 유력한 분에게라도 잘 좀 말씀을 드려서 저도 좀 창조하는
역사의 대열에 서게 하여주십시오. 과거의 잘잘못을 가리어, 현재를
재단(裁斷)하고 미래를 점친다는 인간의 그 아름다운 역사의 행렬에 말입니다.
누구의 뜻으로인지 역사에서 완전히 철거당한 저의 심정은 지금 짐승처럼 외롭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어머니, 너무 오해하지 마십시오. 실상 저는 지금 말이 그렇지 적어도
홍길동의 혈액을 이어받은 저의 이 독한 의지며 총명한 두뇌로써 아무렴 그까짓
역사에서 제외되었다는 정도의 하잘것없는 일로 하여 당신을 잊었을 리야
있겠습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저는 당신을 잊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 끝에 당신을
겨우 잊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알아주십시오. 당신이 돌아가신 이후 저는 줄곧
저의 의식에서 출몰하는 당신에 관한 일체의 기억을 소탕하기 위하여 얼마나
고심했는지 모른답니다. 일상 저의 눈앞에 당신이 떠오른다는 그것은 저에게
있어선 참으로 무서운 형벌이며 동시에 치욕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의 과거란 모름지기 당신을 잊어버리기 위한 가열한 투쟁사의 한
장면이었다고나 할까요. 뭐라구요. 듣자하니 너 이놈 천하에 죽일 놈이라구요.
말로만 그렇게 탓하지 마시고 이 자식을 좀 가차없이 처벌하여주십시오. 제아무리
혹독한 벌이라도 당신이 주시는 거라면 암말 없이 언제나 달게 받을 용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머니.
  그러나 당신을 잊기 위한 노력이 곧 제가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의
문(門)으로 통하는 길이었다면 당신은 이 자식을 더욱 나무라주시겠습니까.
그러셔도 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저는 당신을 잊어야만 했으니까요. 자, 그럼
한번 들어주시겠습니까.

  왜 그런지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저에게는 당신의 그 눈이며 코며 입이 자아내는
자애스러운 표정이 아니라, 항시 협박하듯 당신의 음부(陰部)만이 커다랗게
확대되어 가지고는 저의 시야를 온통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이 망측스러운
환상을 지우기 위하여 저는 밤낮 없이 머리를 흔들어야 했거든요. 그리고 눈을
꼬집고 뒤통수를 때려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록에 당신의 음부는 더욱 그
색채며 형태가 또렷하여지면서 발광하듯 움직이더군요.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더럽고도 무서운 그리고 때로는 황홀하기조차 한
빛깔이며 형태로서 당신의 음부는 민첩하게 신축(伸縮)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어, 어머니!"
  신음하듯 당신을 부르며 질겁을 했었지요. 그리고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몽유병자처럼 방황하여야만 했습니다. 아, 징그러운 동작으로 눈앞에서 항시
스믈스믈 움직이며 흔들리는 음부, 음부, 음부의 집산(集散). 그래도 제가 용케
미치지 않은 까닭은 저의 조상인 홍길동의 피가 저의 온몸을 잔잔히 흐르며
도와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겨우 여남은살짜리 철부지였던 저의 눈앞에 그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공개하여주신 당신의 그 음부가 이렇게 오래도록 한 인간의 가슴속에 깊은
상흔(傷痕)을 남길 줄이야 당신도 미처 모르셨겠지요.
  왜 기억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벌써 이십 년 전인가요.

  온몸을 훑는 환희와 흥분과 좌우간 그런 것으로 하여 당신의 숨결이 다 고르지
못하게 흔들리던 날의 그 아기자기한 정경이 말입니다.
  그날 당신은 동생 분(粉)이와 저를 한아름에 꼭 껴안으시고 온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우셨지요.
  "아가야, 이제 아빠가 오신단다."
  "뭐, 아빠가?"
  "그럼, 아빠가 오시잖구. 이젠 해방(解放)이 된거야."
  "해방?"
  "암, 해방이 되구말구. 미국이 말이지. 일본놈을 아주 쳐부신거란다. 그러니깐
아빤 이제 일본놈들을 피해다니지 않아도 괜찮게 된 거야. 이젠 되레 일본놈들이
아빨 피해다닐걸. 무서워서 말이지. 히히히. 암, 그렇구 말구. 너희 아빠가 아주
얼마나 무섭구 훌륭한 사람이라구. 분아, 만수야, 그렇지? 응? 어서 말해 봐. 
  그렇지 응?"

  이렇게 자꾸 당신이 독촉하는 바람에 얼핏 그렇다고 대답은 했었지만 저는 영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희들의 그 멋없는 대답에도
당신은 정말 눈물이 핑 돌 만치 엄청나게 감격하시더군요. 연시(軟枾)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양볼로 저희들의 온몸을 부지런히 문지르시면서,
  "아이고, 요것들 참 착하기도 하다. 분아, 만수야, 암, 그렇구말구. 이제 뭐
걱정이 있나. 아빠의 소원대로 이젠 우리나라도 독립을 하것다, 아빠도 오실 거구,
그럼 이젠 뭐 잘살게 되는 거지, 암, 그렇구 말구. 분아, 만수야, 우리도 이젠
마음놓고 잘살게 되는 거야. 알겠어? 응, 아빠와 함께 말이지."

  자신만만한 투로 연방 잘살게 된다는 말만을 되풀이하시던 당신, 그때 저는
무엇인가 평상시의 당신의 말씀과는 전혀 그 격조(格調)가 다른 높고 떨리는 말씀
앞에서 괜히 가슴이 울렁거리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돌연 당신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그 미국이니 해방이니 독립이니 하는 낱말들은 생경(生硬)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러나 아빠가 오신다는 이 뜻하지 않은 말과 함께 좌우간 당신의 그
전에 없이 황홀한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근근 저희들에게도 무엇인가 졸연치 않은
일들이 닥쳐올 것만 같은 부푼 기대와 감동으로 하여, 저도 당신 못지 않게 온몸이
하늘로 붕 뜨는 기분이었지요.

  그후 낮과 밤을 가림이 없이 약수에 목욕하고 빈번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하늘을 향하여 정성껏 두 손을 모으시던 당신. 그 옆에서 저도 무조건 무릎을
꿇었잖아요.

  '아빠가 오신다.'
  좌우간 이 말은 미국이니 뭣이니 하는 어려운 말 따위와는 비교가 안되게 어린
저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여준 탓이었겠지요. 언젠가 한번 건넌방에서 흘깃 보고 만
그분이, 수염이 많고 눈이 부리부리하시던 그분이, 그리고 손을 꼭 잡힌 채 엄마가
흑흑 느껴 우시던 그분이 정말 아빠라면, 우리 아빤 힘이 세고 무서운 사람임에는
틀림없겠고, 그렇게 무서운 사람과 함께 한집에서 사노라면 평소에 나를
업신여기고 못살게 굴던 이웃집 돌만이며 태식이 따위는 그저 영 맥을 못 추고 말
것이라는 저의 속셈이 크게 작용한 탓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리하여
저도 끝까지 긴장된 마음으로 당신을 따라 하나님께 부탁했었지요.

  "하나님, 우리 아빠를 빨리 보내주세요. 우리 집 세 식구는 이렇게 지금
아빠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거든요. 하루 속히 아빠의 그 훌륭한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네."

  여기까진 그래도 당신의 기도 소리와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저는 그때 무슨 딴
생각이 있어 그랬는지,
  "엄마는 밤마다 목욕하고 머리 감고 그리고 아주 색시처럼 예쁘게 차리고는 아빨
기다리고 있거든요."
  이런 뚱딴지같은 소리를 멋대로 첨가하는 바람에 당신은 더욱 상기된 얼굴로
저를 지그시 내려다보시며 약간 눈을 흘기는 듯하시다간 이내 미소를 지어
보이시던 당신의 그 아름다운 모습을 저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답니다.

  어머니.
  아마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요.
  밤새 지우고 찢고 하면서 정성껏 만든 태극기와 성조기를 앞세우고 날으는 듯한
걸음으로 무슨 환영대회에 나가시던 날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늦게 당신은
절망스럽도록 이지러진 표정으로 짐승처럼 해괴한 소리를 치시며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다만 아연할 뿐이었습니다.

  도대체 어찌 된 판인가.
  흩어진 머리에 갈가리 찢긴 옷하며 벌겋게 독이 오른 눈, 그리고 피 묻은
자국하며 떨리는 입술.

  이렇듯이 전혀 엄마 같지 않은 무서운 모습을 하고 출현하신 당신을 대하고
분이와 저는 숨 한번 제대로 못 쉬고 벌벌 떨기만 했었지요. 불과 한나절 사이에
엄마가, 아니 하나의 인간이 이렇게도 원 딴판으로 변할 수가 있을까. 무엇인가
졸연치 않게 즐거운 일이 생길 것만 같던 저의 부푼 기대는 순간, 사지가 떨리는
불안과 공포의 덩어리로 돌변하더군요. 정말 졸연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철없는 저희들 앞에서 무슨 짓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참 망측스럽게도 당신은 우선 옷을 벗더군요. 연방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갈가리 찢어진 치마와 저고리는 물론, 속곳이며 내의 그리고 구겨진 팬티까지를
훌렁 벗어 던진 당신은 알몸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여인의, 아니 엄마의 알몸,
저는 무서운 것도 무서운 것이었지만 공연히 부끄러워서 그만 온몸이 착 하고
눌어붙는 기분이더군요. 땀이 났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희들의 이 난처한 사정은
조금도 돌보지 않으시고 그 환히 들여다보이는 가랑이 사이의 그것을 마구
쥐어뜯으시더니, 고만 벽이 흔들리게 고함을 치시더군요.

  "아이고, 이 천하에 때려죽일 놈들앗, 내가 뭐 너희들을 위해서 밑구멍을 지킨
줄 아냐! 엉! 이 벼락을 맞을 되지 못한 것들앗. 흥! 어림없다, 아이고, 내사
원통해, 그러니 우리 남편만 불쌍하지, 아 글쎄 나도 사위스러워서 제대로
만져보지 않은 밑구멍을 아 어떤 놈 맘대로 찔러! 이 더러운 놈들앗, 아이고,
더럽다, 더러웟." 연신 이렇게 더럽고 분하다면서 당신은 아무 데다나 대고
침을 탁탁 뱉으셨습니다. 당황한 저는 정말 말로만 듣던 지옥에 들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온통 무섭게만 보이더군요. 순간, 당신은 민첩하게 저의 머리를
나꿔채시더니 아 억지로 저의 얼굴을 당신의 가랑이 사이에 바싹 갖다 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확 끼치는 악취, 그리고 두려움, 하나 당신은 잠시도 무슨 여유를
주지 않고,

  "자, 보란 말이다. 이놈의 새끼야. 아 내 밑구멍을 좀 똑똑히 보란 말이엿.
아이고 분해, 이놈의 새끼야, 좀 얼마나 더러웠졌나를 눈을 비비고 좀 자세히 보란
말이엿."
  그러면서 밑에 갖다 댄 저의 골통을 사정없이 쥐어박으시더군요. 저는 아마
파랗게 질렸었지요. 저는 그때 광란하듯 흔들리는 당신의 손을 꼭 붙잡고는,

  "아이고, 엄마, 엄마."
  잘 울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던 기억만이 지금 어렴풋이 남아 있으니깐요.
하지만 어머니, 당시 저는 그렇게 수습할 수 없는 경황 중에서도 당신의 가랑이
사이에 참으로 예기치 않았던 기이한 형태의 기관이 있었음을 발견하고 놀라움과
동시에 일종의 쾌감 비슷한 감정으로 하여 아랫도리가 다 자르르 흔들렸다면
그래도 당신은 저를 자식으로 생각하여주시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때
당신은 참 어린 저희들에게 너무하셨으니까요. 이제 와서 어떻게 생각하시건 별로
섭섭하진 않습니다. 관심도 없구요. 어쨌든 당신은 미군한테 겁탈을 당하고
미쳤다는 이러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는 가운데 알몸이 되어 얼마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시더군요. 그리고 연방 무슨 소린지 모를 소리를 지르시며
사타구니만을 열심히 쥐어뜯으시던 어느 날, 당신은 갑자기 목구멍이 터져라
하고,
  "이 죽일 놈들아! 날 죽여다오."
  애절하게 외마디소리를 치시더니 영 그냥 눈을 감고 마셨습니다.

  어머니.
  용서하여주십시오. 아까도 대충 말씀드렸지만 그 후 저는 당신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꿈결처럼 당신을 빼앗긴 아쉬움이, 억울함이 제아무리 거세더라도
저는 이를 악물면서 당신을 잊어야만 했거든요. 불효스럽게도 당신에 관한 생각을
떠올리기만 하면 뭣보다도 먼저 당신의 그 흉측한 음부가 커다랗게 확대되어
가지고는 저의 눈앞을 탁 가로막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미칠
노릇이었습니다. 한 인간이 미친다는 사실이 그 얼마나 더럽고 창피스러우며 또한
무서운 노릇이던가를 당신을 통해서 뼈가 아프게 체험한 저는 오로지 미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신을 꼭 잊어야만 한다는 것이 어느 결에 제 인생의 무슨 신조처럼
굳어 버렸던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따지고 보면 제가 아직까지 한번도 당신의 유택(幽宅)을 찾지 않은 까닭도 실은
그러한 제 인생의 신조를 관철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처였다면 무어라
책망하여주시겠습니까.

  하지만 어머니, 이젠 당신이 묻힌 자리를, 그 유택을, 자식된 도리로서 제아무리
찾고 싶어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딱한 형편에 저는 지금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변명을 하려느냐구요. 원 천만의 말씀을 다 하십니다.

  자, 보십시오.
  도시의 미관과 경제의 성장을 위해서 이십여 년이나 당신이 누워 계시던 자리엔
지금 빌딩이, 하늘을 향하여 요란스럽게 빛을 던지고 있답니다. 다시 말하면
요정(料亭)이, 은행(銀行)이, 호텔이, 그리고 외인상사(外人商社)가 당신의 유택을
강점하여 도시의 미관이란 미명 하에 빌딩이란 이름으로 둔갑(遁甲)을 하고 있는
거죠. 왜 섭섭하십니까. 뭐라구요? 거 참 잘된 일이라구요. 원래가 땅이란 그렇게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의 편에 서서 효과적으로 이용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정말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저렇게 풍부한 빌딩의 밀림 속에서도 저와 같은 비천한 백성이 마음놓고
출입할 수 있는 단 한 짝의 문과, 기진한 몸을 풀기 위하여 잠시 휴식할 수 있는
단 한 평의 면적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허허 참
넌센스라구요. 저승에는 그런 법이 없다, 이 말씀이시죠. 참 당신도, 저승과
이승과를 그렇게 오래도록 혼동하고 계시면 염라대왕에게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좌우간 이승에 뿌리 박은 아니 내 조국 대한민국에 자리잡은 그 빌딩이란 이름의
호화스런 인간의 거처는 말입니다. 기이하게도 항시 이방인과 몇몇 고관과 그리고
그들의 단짝들만을 위해서 문호를 환히 개방하고 있을 뿐, 저희들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흔들어도 열리지 않는 깊은 유택이며 동시에 높은 신전(神殿)이었습니다.
어머니, 오해하지 마시고 빌딩의 층과 수가 번창하여갈수록 이렇게 자꾸만 밑으로
패망하여가는 저희들의 이 참담한 생활을 한번 굽어보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저는
빌딩이 첩첩하게 쌓인 번화가를 거닐 때마다 감히 고개를 바로 쳐들 수가 없는
형편인 것입니다. 영롱한 빛으로 장식된 빌딩의 저 깊은 밀실(密室)에서는 오늘도
우리들을 이 이상 더 못살게 하기 위한 무슨 가공할 음모가 기필코 꾸며지고 있을
성싶은 그런 일종의 피해의식이 번번이 저의 뒤통수를 억압하는 탓이라고나
할까요. 어지럽습니다.

  빌딩, 어제도 오늘도 당신의 유택을 짓밟고 동시에 저를 억누르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서는 빌딩의 저 희멀건 낯짝을 좀 보십시오. 당신은 골이 흔들리지 않습니까.
너 이놈, 네가 지금 빌딩을 감상하고 있을 때냐구요. 딴소릴 하시는군요. 뭐 이제
십분이 남았다구요. 아 그까짓 십분이면 어떻고 일분이면 어떻습니까. 그렇다고 뭐
제가 죽나요. 글쎄 저는 도저히 이대로 죽을 수가 없다고 하잖았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도대체 제 말씀을 뭘로 아시고 번번이 헛소릴 하십니까. 섭섭합니다. 아,
당신은 아직 리시버에서 귀를 떼지 않으셨군요. 암만 들어도 결국 그 소리가 그
소리인 것을. 그래도 한번 들어두는 것이 제 신상을 위해서 좋을 것 같다구요.
하하 참, 어디 계시건 자식 생각은 여전하시군요. 젠장, 그럼 한번 들어보지요.

  "기대하여 주십시오. 전세계의 시민 여러분. 앞으로 십분, 이제 단 십분 후면
오물을 파괴하는 아름다운 섬광이 여러분들의 심신을 황홀한 도취의 광장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인간의 자유와 번영을 수호하는 미 병사의, 아니
미 병사의 아내를 강간한 자의 말로가 얼마나 참혹하고 싸늘한가를 말입니다. 자,
감상하여보십시오. 오물은 쓸어야 하는 것입니다. 악의 씨는 송두리째 뽑아야 하는
거구요. 악의 씨를 뽑기 위한 이 성스러운 작업에 투자한 액수가 물경 삼억 불.
여러분, 똑똑히 보시고 역사의 증인이 되어주십시오. 악의 씨가 폭발하는 이
역사적인 광경은 본 펜타곤 당국이 선발한 프론티어 텔레비전이 코스모스 위성을
통해서 지구의 곳곳마다 선명하게 잘 전하여줄 것입니다. 이 저주받은 강간자여!
미국의, 아니 자유민의 명예에 똥칠을 한 간악한 범법자여! 천벌을 받으라."

  기가 막히는군요. 저보고 뭐 강간자라구요. 이게 다 거의 헛소리라면 당신은
저를 믿어주시겠습니까. 아니 설혹 제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강간을 했다면 왜
천벌을 받습니까. 당신을 강간하여 저승으로 인솔하기까지 한, 어떤 코 큰 친구도
천벌을 받았다면 혹시 또 모르지만 말입니다.

  "글쎄 너 이놈."
  안색이 아주 좋지 않으시군요. 어서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홍길동의 자손인 나
만수란 녀석이 아무렴 그따위 못된 짓을 했을 리야 있겠습니까. 혹시 엉겁결에
제가 강간 비슷한 짓을 했을지는 모릅니다만. 솔직하게 말해서 제 말씀은
말입니다. 오랜 세월 가슴에 쌓이고 쌓인 무슨 한(恨)과 같이 항시 저를
들볶아오던 한가지 크나큰 의심을 풀어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씀이거든요.
무슨 말이 그러냐구요. 그러시겠지요. 실은 진작 자세한 말씀을 여쭙고 싶었지만,
그러면 혹시 당신의 노여움이 지나쳐서 또 한번 발광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아직 자세한 말씀은 보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뭐라구요?
  아 하 참 그러십니까. 죽은 사람의 심장은 하도 냉해서 그럴 리가 없으시다구요.
그러니까 제아무리 자극적인 끔찍한 말에도 절대로 무슨 충격을 받을 염려가 없다
이 말씀이시지요. 좋습니다. 그걸 제가 아직 몰랐었군요. 그럼 이제 안심하고 당신
앞에선 그 어떠한 내용의 말씀도 서슴지 않을 생각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쉽게
요점만을 말씀드리자면 천하에 둘도 없이 기른 당신의 소중한 딸이며 동시에 저의
누이동생인 분이가 아, 어이없게도 당신을 겁탈한 바로 그 장본인일지도 모르는
어느 미 병사의 첩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미 제 엑스 사단의
스피드 상사. 어머니, 왜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절대로 몸을 떨지 마십시오.
역시 불가항력이었으니깐요. 그럼 생각하여 보십시오.

  당신이 가신 이후 그렇게도 염원하던 아빠의 모습은 보이질 않고 그리하여 끝내
유배(流配) 가듯 분이와 함께 그 가난한 외가를 찾은 저희들의 형편은 그 동안 참
말이 아니었습니다.

  "야, 야, 야."
  듣기 싫다 이 말씀이지요. 알겠습니다. 저도 숫제 입을 봉하는 편이 좋겠군요.
좌우간 세상물정을 조금 알기 시작할 무렵 저와 돌연히 충돌한 6·25니 피난이니
입대니 하는 그 쓰라린, 아니지요 어머니, 쓰라린 정도의 형용사를 가지곤 어림도
없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천벌 비슷한 재앙의 노정을 무사히 겪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그때 군복을 벗고 터벅터벅 돌아온 저의 그 파리한 몸 하나를 어디 비집고
처넣을 데가 없더군요, 세상엔. 막막했습니다. 걸식과 방황과 그러나 그때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신은 아직 완전히 주무시진 않던 모양이었습니다. 돌연 제 앞에 한
아름다운 여인이, 분이가 등장해 주었으니깐요. 감격했습니다. 분이는 모든 것을
숨기지 않더군요. 물론 당신처럼 미친 모습도 아니었구요. 도리어 분이는 무엇인가
행운을 잡은 듯한 표정으로 스피드 상사와의 관계를 자랑스럽게 털어놓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순간 저는 하늘이 까맣게 내려앉는 느낌이었습니다. 가슴이 콱
막히면서 누구한테 고문이라고 당하고 나야만 속이 풀릴 것 같은 심정이었지요.
그리하여 한참이나 저는 말을 못하고 넋빠진 사람처럼 그저 그렇게 멍하니 서
있으려니까, 갑자기 분인 저의 앙상한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흑흑 느껴
울더군요. 그리고 밑도끝도없이 오빠의 용서를 바란다고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남의 일에 관여할 만한 기력이 없었거든요. 정말입니다. 한 인간을
책망하거나 용서하는 일에 착수하기 전에 우선 뭘 좀 먹고 한잠 푹 자고 싶은
욕망만이 저를 위협하고 있었으니깐요. 아 난처한 저는 끝내 윗사람으로서 이런
경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만 좋을지를 몰라서 망설이기만 하다가, '엄마 엄마.'
  턱없이 당신을 부르며 병신처럼 목놓아 울었다면 어머니, 저와 같이 지질한
인간은 저승에 가서도 필경 놀림거리가 되겠지요. 알겠습니다. 순간 분이는 오빠의
그러한 심경을 대충 짐작하겠다는 듯이 한번 빙긋 웃고는 조용히 자기의 거실 바로
옆방으로 저를 안내하여주더군요. 따뜻했습니다. 우유와 버터와 초콜릿과 껌 등이
자아내는 향기 속에서 저는 목석처럼 순종했었지요. 그리하여 저는 분이가
지시하는 대로 지금껏 세칭 소위 그 양키 물건 장사에 종사해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머니.
  너 이놈, 그년을 그저 당장에 박살을 내지 못한 놈이 무슨 염치로 잔소리가 그리
심하냐구요.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당신 같아도 아마 속수무책이었을 겁니다.
불효막심한 말씀이긴 합니다만 만약에 당신이 지금 살아 계시다면 당신마저 솔선
이방인들에게 몸을 바치지 못하여 안달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 어머니, 진정하여주십시오. 뭐라구요. 에미를 모욕하는 너와 같은 종자는 그저
당장에 주둥아릴 찢어놓아야 한다구요. 매우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막된 놈이기는 할망정 그래도 의로움의 화신인 홍길동의 자손인데 추호라도
원 당신의 인격을 모욕할 의사야 있었겠습니까.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 말씀은
말입니다, 생전에 당신이 그렇게도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라고, 그 품행이며 미모를
입이 닳도록 칭찬하여 주시던 옥이도 숙이도 그들은 지금 이방인들의 호적(戶籍)에
파고들어갈 기회를 찾지 못하여 거의 병객처럼 얼굴에 화색을 잃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것 참 기절초풍할 노릇이라구요. 물론
그러시겠지요. 그러나 어디 여인들뿐인가요, 사나이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대학을 둘씩이나 나왔다는 어떤 친구도, 양키를 매부(妹夫)로 삼은 저를 다
특혜족으로 인정하는지 저를 볼 때마다 사뭇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미국으로
통하는 길 좀 열어달라고 호소하는 형편이니 뭐 다 알 노릇이 아닙니까. 이러한
주변의 어이없는 분위기와 접촉할 때마다 저는 무엇인가 통쾌한 그러면서도 형언할
수 없는 울분으로 하여 절로 주먹이 쥐어지면서 청중도 없는데 공연히 열변을
토하는 수가 있다면 당신은 눈살을 찌푸리시겠지요.

  "이 견딜 수 없이 썩어빠진 국회여 정부여, 나 같은 것을 다 빽으로 알고 붙잡고
늘어지려는 주변의 이 허기진 눈깔들을 보아라. 너희들은 도대체 뭣을 믿고 밤낮
없이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헤게모니 쟁탈전에만 부심하고 있는가. 나오라,
요정에서 호텔에서 관사에서, 그리고 민중들의 선두에 서서 몸소 아스팔트에
배때기를 깔고 전세계를 향하여 일대 찬란한 데몬스트레이션을 전개할 용의는
없는가. 진정으로 한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원조를 해줄 놈들은 끽소리 없이 원조를
해주고 그렇지 않은 놈들은 당장 지옥에다 대가리를 처박으라고 전세계를 향하여
피를 토하며 고꾸라질 용의는 없는가. 말하라 말하라."

  온몸에 땀이 번지도록 된 소리 안 된 소릴 이렇게 마구 지껄이다 보면 저는 고만
문득 멋쩍고 부끄러운 생각에 고개를 바로 쳐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시 옆에서
누가 엿들은 사람은 없을까. 원 큰일날 소리. 정말 그랬다면 문제없이 나를 향하여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했을 것은 뻔한 이치가 아닌가. 순간 저의 온몸엔 소름이
쭉 돋아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처럼 미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입을 닥쳐야만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분이의 소행을 책하기 전에 먼저 오빠 된 사람으로서
분이의 건강을 염려해주어야 했다는 말씀입니다. 뭐 시끄럽다구요. 아무리
시끄러워도 들어주실 것은 다 들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머니.
  참말이지, 스피드 상사가 저녁마다 분이에게 가하는 그 우려할 만한 사태에
접하고 저는 항시 입맛이 썼던 것입니다. 당황했거든요. 원 그럴 수가 있을까.
저와 같은 인간의 상식을 가지고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뭐냐구요.
참 어이없게도 스피드 상사는 밤마다 분이의 그 풍만한 하반신을 이러니 저러니
탓잡아 가지고는, 본국에 있는 제 마누라 것은 그렇지가 않다면서,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과 폭언으로써 분일 못 견디게 학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보기엔 그렇게도 탐스러운 한 송이의 꽃이, 그 곱고 부드러운 피부며 아기자기한
둔부의 곡선이, 그리하여 보기만 해도 절로 황홀한 쾌감을 자아내는 분이의 그
아름다운 육체가 무엇 때문에 밤마다 그렇게도 잔인한 곤욕(困辱)의 장(章)을
겪어야만 하는가. 저의 재능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뿐더러 어떤
날은, 심지어 국부의 면적이 좁으니 넓으니 하며 가증스럽게도 분일 마구 구타하는
일조차 있다는 사실에 이르러서는 실로 아연할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용케 아무런
항변이 없이 스피드 상사의 그 스피디한 발길질을 견디며 간간 '아야, 아야'하고
울기만 하는 분이의 그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저는 무엇인가 무너져
내리는 아픔과 압박감을 느끼며 저도 분일 따라 병신처럼 울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크나큰 의문에 싸이어 안절부절을 못했었지요. 그것은 스피드
상사가 항시 본국에 있다고 자랑하는 미세스 스피드의 하반신에 관한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그 여인의 육체는, 아니 밑구멍의 구조며 그 형태는
어떨까. 좁을까 넓을까, 그리고 그 빛깔이며 위치는. 좌우간 한번 속시원하게
떠들어보고 의문을 풀어야만 미치지 않을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어머니.
  이렇듯이 절박한 의문을 하루 속히 풀어 보고 싶은 충동으로 하여 온몸이 다
벌겋게 달아올라 가지고는 전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어느 날, 그러니까 며칠
전이었지요. 저에게는 마음의 혼란을 일으킬 만치, 뜻하지 아니한 행운의 찬스가
찾아온 것입니다. 돌연 제 앞에 그 문제의 주인공인 스피드 상사의 부인이, 비취란
이름의 아름다운 애칭(愛稱)을 가진 여인이 출현해준 것이었거든요. 정말입니다.
저도 처음엔 혹시 이게 꿈이 아닌가 의심했었지만 결국 정말이었습니다. 오로지
남편을 보고 싶은 일념으로, 아니 풍문으로만 듣던 그의 전공(戰功)과 노고를 좀더
가까이에서 실감해 보고픈 욕심으로 비취 여사는 만사 제폐하고 코리아를
찾아왔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왕관 비슷한 모자를 쓰고 성조기 무늬의 화려한 백을
든 비취 여사의 그 쭉 뻗은 각선(脚線)은 실로 절경이더군요. 순간 저는
탄복했습니다. 비취 여사의 미모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도 쉽사리 의문을 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주신 신의 그 깊은 배려가 가슴이 아리도록 고마운
탓이었습니다. 저는 잠시도 주저할 필요가 없었지요. 다음날 저는 곧 제 조국의
산하(山河)를 소개하여주겠다는 명목으로 스피드 상사의 양해 하에 비취 여사를 이
향미산의 정상으로 유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저는 정말 그녀의 하반신을
한번 관찰함으로써 저의 의문을 풀고 싶었을 뿐, 그 외의 다른 아무런 흉계도
흑막도 없었거든요. 어머니, 믿어주십시오. 그리하여 저는 비취 여사를 향하여
사뭇 공손한 태도로, 제 조국의 산하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반만년의 역사에
빛나는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여사에게 한가지 청이 있다고 정중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여사는 그 청이란 게 대관절 뭐냐면서 방긋 웃어 보이더군요.
저는 솔직하게 고백하듯 말했던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옷을 좀 잠깐 벗어 주셔야 하겠습니다."
  "뭐라구요?"
  여사는 금시로 눈이 휘둥그래지더군요. 하지만 저는 시종 침착한 어조로, 여사의
하반신 때문에 밤마다 곤욕을 당하는 분이의 딱한 형편을 밝히고, 탓으로 단
하나인 누이동생의 건강을 보살피자면 부득불 나는 여사가 지닌 국부의 그
비밀스러운 구조를 확인함으로써 그 됨됨을 분이에게 알려주어, 분이가 자신의
육체적인 결함이 어디에 있는가를 자각케 하여 그 시정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오빠로서의 입장을 확실히 하자, 순간 여사는 표정을
이상하게 구기면서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갓뎀!"
  비명 비슷한 소리와 함께 번개같이 저의 한쪽 뺨을 후려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찔하더군요. 일껏 신이 저를 생각하여 점지하여주신 행운의 찬스를 바야흐로
놓치는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 탓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고만 엉겁결에 왈칵
여사의 목을 누르면서 성큼 배 위로 덮쳤거든요. 그리고 민첩하게 옷을 찢고 손을
쓱 디밀었지 뭡니까. 아 미끄러운, 그리고 너무나 흰 살결이여. 저는
감격했습니다. 순간 하늘과 땅도 영롱한 빛깔에 취하여 조금씩 흔들리는 것
같더군요. 여사는 연신 악을 쓰며 몸을 비틀다가 활활 타는 저의 동자를 대하곤
뜻한 바가 있던지 제발 죽이지만은 말아달라고 애원하듯 하고는 이내 순종하는
자세를 취해주더군요. 고마웠습니다. 내가 왜 백정(白丁)이간. 저는 점잖게
부드러운 미소로써 대답을 대신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버터와 잼과 초콜릿 등이
풍기는 그 갖가지 방향(芳香)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여사의 유방에 얼굴을 묻고
한참이나 의식이 흐려지도록 취해 있었거든요

  "원더풀!"
  얼마 만에야 무슨 위대한 결론이라도 내리듯 이마의 땀을 씻으며 겨우
한마디하고 여사의 몸에서 내려온 저는 세상이 온통 제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더군요. 치부(恥部)의 면적이 좁았는지 넓었는지에 관해서는 별반 기억에
없었지만 좌우간 이제 분이를 향하여 자신하고 한마디 뭔가 어드바이스를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감격으로 사뭇 들뜬 기분이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지요. 비취 여사는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헬프 미! 헬프 미!"
  위태로운 비명과 함께 정신 없이 산을 뛰어내려가더군요. 왜 저럴까. 헝클어진
머리며 찢어진 옷. 달아나는 여사의 뒷모습은 분명히 언젠가 당신이 발광하여
돌아오시던 날의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왜 그런지 가슴이 후련해지면서 왈칵 겁이 나더군요. 비취 여사도
혹시 당신처럼 미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걱정도
잠시뿐, 이른바 인간의 천국이라는 미국을 한아름에 안아본 성싶은 그 벅찬
감동으로 하여 저는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하늘을 향하여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려던 찰나, 그렇지요, 바로 그
찰나였지요. 탕 탕 탕. 난데없는 총성이 저를 목표로 하여 주변의 산하를
요란스럽게 울리지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머니.
  저는 정말 저의 입장을 해명할 잠시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방황하며 목숨을 이은 지 연 사흘, 오늘 드디어 펜타곤 당국은 저를 악마가 토해낸
오물이며 동시에 인간 최대의 적으로 판정하고 전세계의 이목을 이 향미산으로
집중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딱했습니다. 오죽 답답하면 제가 죽은 당신을
다 붙잡고 하소연을 하게 되었겠습니까. 저는 생각다 못하여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의 출신구 민의원인 공(空) 모(某) 의원을 찾아가 저의 잘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저의 입장을 좀 대변하여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들리는 바에 의하면 공 모 의원은 벌써 스피드 상사의 상관을 찾아가 열 몇
번이나 절을 하고 내 출신구의 유권자 중에 그렇듯이 해괴한 악의 종자가 인간의
탈을 쓰고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본인의 치욕이며 동시에 미국의 명예에 대한
중대한 위협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나서, 내 의정단상에 나가는 대로 자유민의
체통을 더럽힌 그따위 오물을 사전에 적발하여 처단하지 못한 사직당국의 무능과
그 책임을 신랄하게 추궁할 것임을 거듭 약속하고 나오시더라니, 어머니 저는 정말
누구의 품에 안겨야만 인간이란 소리를 한번 들어보고 죽을지 캄캄하기만 합니다.
뭐라구요. 이제 뭐 일분이 남았는데 무슨 소릴 하고 있느냐구요. 아 그까짓
일분이면 어떻고 일초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질기고 질긴 한(恨)으로 사무친 저와 같은 인종은 누가 죽인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저 죽고 싶을 때 죽는 거지요. 그보다도 지금 저 소나무
가지 사이사이로 수정처럼 말갛게 흐르는 제 조국의 청신한 하늘이나 좀
감상하여보십시오.

  얼마나 흐뭇하고 아름다운가를. 참으로 오래간만에 사지를 쭉 뻗고 이렇듯이
한가한 마음으로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어 그 하늘을 통하여 처음으로
당신의 음부가 아닌 당신의 자애로운 모습을 대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지금 흡족합니다.

  어머니.
  물론 이제 곧 펜타곤 당국이 만천하에 천명한 대로 기계의 점검이 끝나는,
앞으로 일분 후면 요란한 폭음과 함께 이 향미산은 온통 불덩어리가 되어 꽃잎처럼
흩어질 테지요. 그리고 흩어진 자리엔 이방인들의 그 넘치는 성욕과 식욕을
시중들기 위하여 또 하나의 고층빌딩이 아담하게 세워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최후니깐요. 이제 저의 실력을 보여줘야지요.
예수의 기적만 귀에 익힌 저들에게 제 선조인 홍길동이 베푼 그 엄청난 기적을
통쾌하게 재연함으로써 저들의 심령을 한번 뿌리째 흔들어놓을 생각이니깐요. 물론
저들은 당황할 것입니다. 어머니, 그때 열렬한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앞으로 단 십초. 그렇군요. 이제 곧 저는 태극(太極)의 무늬로 아롱진 이
러닝샤쓰를 찢어 한 폭의 찬란한 새 깃발을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구름을
잡아타고 바다를 건너야지요. 그리하여 제가 맛본 그 위대한 대륙에 누워 있는
우윳빛 피부의 그 윤이 자르르 흐르는 여인들의 배꼽 위에 제가 만든 이 한폭의
황홀한 깃발을 성심껏 꽂아 놓을 결심인 것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어머니,
거짓말이 아닙니다. 아 그래도 당신은 저를 못 믿으시고 몸을 떠시는군요. 참 딱도
하십니다. 자, 보십시오. 저의 이 툭 솟아나온 눈깔을 말입니다. 글쎄 이 자식이
그렇게 용이하게 죽을 것 같습니까, 하하하. 
                                      (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