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 5
글쓴날 : 2002-11-12 01:49:46
글쓴이 : 사월혁명회 조회 : 7364
제목: 이승만 바로 알기 -반민족,반민주, 반통일적 독재자-

이승만 바로 알기
-반민족, 반민주, 반통일 독재자-

이승만은 4월혁명으로 그 역사적 죄과가 판가름난 희대의 독재자였다. 4월혁명이 왜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려면 4월혁명으로 쫓겨난 이승만을 바로 알아야 한다.

1. [독립운동을 분열시킨 이승만](1908년 - 1940년대)

* 사이비 독립운동가: 1908년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가 미국에서 재미동포 전명운, 장인환 의사에 의해 암살되었을 때, 그 재판의 통역을 요청받은 유학생 이승만은 '살인재판'의 통역을 원치 않는다며 이를 거절했다. 그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거사도 '살인행위'라고 비난했다. 1914년 하와이에서 애국자 박용만 등이 일본 함선 폭파를 계획했을 때 이승만은 "열강에 나쁜 인상을 준다"는 이유로 이를 음해했다.
* 독립청원 운동: 이승만은 1918년 말부터 1924년까지 독립운동에 잠시동안 관여한 것을 빼고는 1930년대 말까지 독립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와 맞서다 미국에 안주한 후 무력투쟁, 의열(義烈)투쟁은 반대하고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등 열강의 호의에 의존하는 외교활동에만 주력했다.
* 임시정부의 탄핵: 이승만은 '이승만 가는 곳에 민족분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분파싸움을 심하게 벌여 가는 곳마다 독립운동을 분열시켰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보낼 자금을 가로챘다는 비난을 수없이 들으면서 미국에서 교포들의 성금으로 편하게 지냈다. 결국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탄핵으로 쫓겨났다.

2. [해방정국과 친일. 민족분열 노선]

* 친일파와 제휴: 이승만은 해방된 지 두 달이 지난 1945년 10월 16일에 귀국하여 독립운동가들과 임시정부를 멀리 하면서 지주, 자본가, 친일파를 대변하는 한민당과 짜고 친일경찰을 앞세워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졌다.
* 반민특위 습격: 이승만은 친일파 제거를 계속 반대했으며, 친일파 처단은 민심만 혼란시키고 '통일'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친일파 처단을 위해 설치된 반민특위가 1949년 일제시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던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 등을 체포하자 이승만은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고 급기야는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단독정부 추진: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과 남북분단을 한국인 최초로 주장했다.
* 반민족적 분단운동: 이승만은 1947년에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여 통일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단정 수립을 촉구했다. 그의 반탁운동은 백범 김구와는 달리 자주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민족분열책동의 한 방법으로서 자신이 정권을 쥐기 위한 분단운동이었다.
* 민족지도자 암살: 1947년 7월 19일 좌우합작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던 건국준비위원장 여운형 선생이 암살되었다. 또 1949년 6월 26일에는 친일파 제거와 자주통일을 외치던 김구 선생이 이승만의 심복들의 조종을 받은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 암살범 안두희는 전쟁 때 곧 석방되어 진급을 거듭하고 부호가 되었다.
* 제주도 등 양민 학살: 제주 4.3 사건과 관련하여 제주도민 3만명 이상이 희생된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양민이 학살되었다.

3. [반민주적 독재.타락정치]

* 국가보안법 공포: 1948년 12월 1일 이 법이 공포됨으로써 이승만은 자주적 통일운동에 쐐기를 박고 분단체제를 강화하면서 정적이나 비판자들까지도 빨갱이로 몰아 처형했다. 1959년에는 평화통일을 주장하여 1952년과 1956년 두 차례 대통령선거에서 차점자가 된 조봉암 진보당 위원장을 처형했다.
* 반농지개혁법: 1949년 국회가 농지개혁법을 통과시키자 이승만은 이를 되돌려보내 토지상환액을 상향조정하여 농지개혁법을 개정하게 했다.
* 국민방위군 사건: 이승만 독재의 첨병이던 국민방위군 고위 간부들이 한국전쟁중인 1951년에 양곡 5만2천석을 착복하는 등 엄청난 부정을 저질러 겨울철 후방으로 이동하던 수많은 방위군들이 얼어죽거나 굶어죽었다. 이시영 부통령이 이에 항의하여 사퇴했다.
* 중석불 사건: 자유당 정권은 1952년 7월 '중석불' 사건을 비롯하여 군용 원사(原絲) 부정 사건, 산업은행 특혜융자 사건 등 수많은 부정사건을 저질렀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빽과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는 '빽의 나라' '사바사바의 나라'였다.
* 한글파동: 옛날 철자법만 아는 이승만은 한글학자들과 의논도 없이 1953년 10월9일 한글 날 담화에서 현행 철자법은 복잡하니 옛날 철자법을 사용하라고 지시하는 망령을 부렸다. 이 때부터 1년 간 한글파동이 일어났다.

4. [북진통일론과 한국전쟁]

* 한강 인도교 폭파: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다가 1950년에 6.25전쟁이 일어나자 6월 27일 새벽 몰래 도망하여 대전에서 서울 시민에게 '안심하고 있으라'는 녹음방송을 거듭한 후 6월 28일 새벽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 그는 이처럼 무책임하고 반인간적인 대통령이었다.
* 대전협정: 이승만은 1950년 7월 대전협정을 통해 미국에 작전지휘권을 이양했다. 미국은 그 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전시작전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다.
* 거창 양민학살 사건: 1951년 2월 어린이, 부녀자, 노인들이 많았던 거창의 양민 600 여명이 집단 학살당했다. 이승만은 이 사건을 은폐하면서 학살된 양민들은 '통비자'라고 주장했다. 그밖에도 양산 720명, 남원 155명, 산청 600명, 함양 593명, 울산 677명, 함평 524명, 순창 1,028명, 북제주군 756명, 남제주군 1,019명, 제주시 103명 등이 학살되었다. (국회 1960년 6월 21일 양민학살 진상보고서와 당시의 신문 참조)
* 휴전반대 관제 데모: 1953년부터 휴전협정 반대, 미군철수 반대, 북진통일 운동을 벌여 학생과 직장인들은 여러 해 동안 관제 데모나 궐기대회에 동원했다.
* 3차대전 주장: 이승만은 1954년 7월에 미국 의회에서 공산권과의 일대 세계전쟁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여 미국 측으로부터 오히려 경계를 받았다.

5. [정권욕과 독재정치의 말로]

* 부산 정치파동: 1952년 1월 이승만이 제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은 땃벌떼, 백골단 등을 동원하여 '민의'를 조작하고 국회의원들을 협박,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연행, 감금했으며, 국제공산당 사건을 조작하여 국회의원 10명을 투옥했다.
* 발췌개헌: 이어 이승만은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를 절충했다는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내놓고 국회의원들을 국회에 감금한 후 7월 4일 기립투표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어 실시된 공포분위기의 관권선거에서 조봉암이 차점자가 되어 민의의 향방이 드러났다.
* 사사오입 개헌: 이승만은 영구집권을 위해 1954년 대통령 중임제한 조항을 철폐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했으나 11월 27일 찬성표가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2(136명)에 1표 모자라 부결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정부가 사사오입을 하면 개헌안이 통과된 것이라고 주장하여 11월 29일 국회가 헌법개정안의 통과를 선포하도록 했다.
* 5.15 정부통령 선거: 이승만은 자신의 대통령 출마를 청원하는 우의마의(牛意馬意)까지 동원한 대규모 민의 조작운동 끝에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를 실시했으나, 극심한 관권선거였음에도 이승만은 500만표 밖에 얻지 못하고 조봉암이 210만표나 획득했다. 서울에서는 이승만의 득표가 선거유세 중에 급서한 민주당 후보 신익희보다 훨씬 적게 나왔다. 이 선거에서 부통령으로는 자유당의 이기붕이 떨어지고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었다. 그후 장면 부통령은 9월 28일 민주당 정당대회에서 피격 당했는데, 이 사건에는 경찰 총수와 자유당 간부가 관련된 것으로 폭로되었다.
* 24파동: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서 진보세력을 탄압하고 언론에 굴레를 씌우기 위해 1958년 12월 24일 국회에서 무술경관들을 동원하여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강제로 통과시켰다.
* 경향신문 폐간: 1959년 장면 부통령을 지지하는 경향신문을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폐간시켰다. 3.15 부정선거를 위한 예비적 언론탄압이었다.

결국 이승만 독재정권은 1960년 3.15부정선거를 저지른 끝에 4월혁명으로 타도되어 역사의 단죄를 받게 되었다. 이승만은 반민족, 반민주, 반통일적 독재자였다.

* * * * *

<이 자료는 4월혁명 35주년(1995년)을 기해 사월혁명회와 역사문제연구소가 공동으로 작성한 내용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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